자막은 난청 환자에게 분명한 도움이다. 소리를 놓쳐도 글자를 통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어 드라마나 예능을 즐기는 데 훨씬 수월하다. 그러나 도움은 곧 의존으로 바뀌기도 한다. 

실제로 진료 현장에서 TV 시청 시 자막에만 집중하다 보청기 사용을 줄이는 환자들이 늘고 있고, 이로 인해 청각 재활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 늘 신경 쓰인다.(사진 보라매병원 이비인후과 김영호 교수)

보청기는 단순히 소리를 키워주는 기계가 아니다. 귀와 뇌가 꾸준히 소리를 해석하도록 돕는 훈련 도구다. 착용을 게을리하면 청각 신경과 뇌의 청각 중추가 자극을 덜 받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말소리를 구별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이를 ‘청각 박탈 효과(auditory deprivation)’라고 부른다. 학계에서는 “성인의 청각계도 꾸준한 자극(보청기, 청능훈련 등)에 따라 신경가소성이 유지되며, 청각 자극이 줄면 뇌의 말소리 처리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자막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자막은 이해도를 높여주는 유용한 도구지만, 소리 대신 글자만으로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생기면 보청기 착용 시간이 줄어든다. 결국 뇌가 소리를 해석하는 기회를 잃고 청각 기능 유지에도 불리할 수 있다. 자막은 필요할 때만 활용하는 보조 수단이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는 이유다.

청각은 말초의 ‘듣는 능력’과 중추의 ‘해석하는 능력’이 함께 움직인다. 보청기를 통해 말소리 신호가 꾸준히 들어오면 뇌의 언어처리 네트워크가 활성화되고, 시간이 갈수록 복잡한 문장 처리에서도 보완적 뇌영역을 더 잘 동원한다는 연구도 있다.

반대로 소리 입력이 줄면 이 네트워크의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 더 넓게 보면, 난청 교정 자체가 고령층 인지저하를 늦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즉, ‘듣는 힘’을 지키는 일은 비단 귀의 문제가 아니라 뇌 건강과도 연결된다.

실생활에서는 작은 습관 변화로 이런 문제를 줄일 수 있다. TV를 켤 때 보청기도 함께 켜는 ‘페어 습관’을 들이고, 대사는 먼저 듣고 놓친 부분만 자막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다. 주변 소음을 줄이고 스피커를 정면 가까이에 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TV뿐 아니라 라디오, 오디오북, 팟캐스트처럼 자막 없는 음성 매체를 보청기와 함께 듣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청능훈련 지침(Hearing Aids For Adults)에 따르면, 난청 성인에게 청각 훈련(auditory training)은 말소리 인지 능력 향상에 효과적이라는 근거가 있으며, 특히 비시각적 청각 자극(자막 없는 음성)이 권장된다. 즉, 자막 없는 음성 환경에서 꾸준히 훈련하는 것이 청각 기능 유지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단순하다. 보청기는 항상 착용하고, 자막은 보조로 활용하는 것이다. 작은 원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난청 환자의 ‘듣는 힘’을 기를 수 있다.